집은 디자인이 아니다.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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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후즈 작성일18-04-26 10:49 조회5,1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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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 채의 집을 지은 낭만주의 건축가 김기석이 풀어 낸 집이야기

'집은 디자인이 아니다'

글 김기석 / 삽화 구승민? (자료제공: dibook) 

 

 

“집을 ‘읽고’, 집을 ‘쓰다’”

그 책을 홀린 듯이 다 읽은 후 불현듯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몇 년이 지나 나는 책의 저자와 마주 앉아 내가 살 집에 대해 ‘읽고 다시 읽고’, 마침내 그에게 ‘쓰는’ 일을 부탁했다. 

온전히 책이 만들어 낸 인연이었다. 

-양귀자/소설가

 

집은              다.

   

CHAPTER 02 집은, 인류의 문명사다

 ​ 

방은 집의 문명사다.

 

맨발의 공간, 그것은 문명이었다.

예술적인 카펫을 깔고 그 위에서 차를 마시거나, 따뜻한 온돌 위에 기름종이를 바르고 살거나, 최소한 짚을 엮은 두툼한 돗자리(다다미)라도 깔고 살았던 위생적인 몽골 문화권에서는 집 안에서 신발 벗는 것을 당연한 예의로 삼았다. 사실 그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이었다. 

사람이 휴식을 취할 때 구속하는 복잡하고 불결한 모든 장치로부터 발을 해방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동서고금의 모든 의학이 증명하고 있다. 무좀과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부터 깨끗이 하고 맨발의 통풍 상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더해서 우주의 축소판이라는 인간 신체의 축소판으로서 발바닥의 건강은 곧 인체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곧 요가의 지혜이자 한의학의 지혜이기도 하다. 

발바닥은 기공학(氣功學)적으로 온몸의 병기(病氣)와 폐기(廢氣)를 땅으로 빼내는 혈(穴)을 가지며, 일체 기병(氣病)을 다스리는 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발이란 열기를 가두어 유지해도 안 되고 한기를 가두어 두어도 안 되는 법이다. 이러한 민감한 요지요부(要地要部)를 양말과 가죽 구두로 결박하여 온종일 최악의 상황 속에 팽개쳐 놓고 오직 인내만을 강요하는 것이 어찌 야만적 생활 방법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온갖 세균과 오물로 더럽혀진 구두 바닥으로 저벅저벅 안방을 드나들다니, 그게 야만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민족은 전쟁이 나지 않는 한 그런 참혹한 광경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소수 민족의 관습에서는 조금만 눈에 거슬리는 일이 발견되어도 야만이다, 후진이다, 미개다 마구 무시하는 사람들도, 다수의 문명인이 가지고 있는 이런 야만적 족습(足習)에 대해서는 의심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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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청춘」이란 영화가 히트를 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의 내용이 아니고 그 제목이다. 왜 그 제목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맨발’ 때문이다.

우리는 맨발이란 말을 들으면 우선 쾌감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원시의 하얀 백사장으로 갑자기 되돌아간 듯한 환상의 쾌감이다. 맨발 문화권 특유의 강렬한 뉘앙스다. 서양 영화에도 「맨발의 백작 부인」이란 영화가 있었지만 맨발이란 말이 주는 강렬함이 그들에게도 그렇게 진하였을지는 회의적이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언제 맨발을 경험해 보기나 하고 살았던가? 그들에게 맨발이란 일상적 경험이 아니고 예외적 경험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맨발이란 매일매일 매시간의 경험이다. 짧은 휴식 시간에도 맨발을 유지하면 휴식의 강도는 더 강해진다. 목욕 시설이 별로 좋지 않았던 우리는 목욕은 매일 하지 않더라도 발은 매일 씻었다. 더울 때 맨발을 찬물에 푹 담그는 것은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효과적인 피서법이다. 추울 때도 그렇다. 뜨거운 물로 발을 씻고 마사지하는 것은 온몸을 마사지하는 것과 같다. 나는 지금도 맨발의 촉감을 즐기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맨발을 만지작거리는 그런 심정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우리는 가장 행복하고 여유 있는 순간에 맨발로 있다. 맨발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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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신고 사는 사람들에게 바닥은 천한 곳이었다. 천하게 여긴 발바닥과 만나는 곳은 천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직접 몸을 비비대고 잠자는 것은 거리의 천사나 천사도 못 되는 부랑자들뿐이었다. 그러한 문화권에서 사람의 소중한 몸이 잠드는 침대가 바닥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사람들에게 침대 높이는 권위와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요셉 브륄레는 그의 저서 『프랑스의 심장부, 모르방 지방』에서 높이가 낮은 침대는 극도의 빈곤 상태를 보여 준다고 기록하였다. 다음은 그 한 부분을 옮긴 것이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침대, 가장 반듯한 사각 침대의 소유자가 누구인가를 겨루었다. 침대에서 자려면 상자나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맨발 문화권에서 바닥은 맨발과 더불어 소중한 곳이었다. 그래서 화려한 카펫 공예가 발달하였으며 바닥은 섬세한 감촉을 가진 재료로 마감되고 쾌감을 주는 온도로 관리되었다. 바닥은 집에서 가장 감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온몸으로 만나는 품이었다. 여기서는 강아지가 아닌 사람이 얇은 요를 깔고 잠을 잔다. 강아지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거나 부뚜막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바닥과의 친화력은 이 문화권이 만드는 집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가구는 낮아졌고, 창문의 하인방도 낮아졌다. 한국의 민가에 있는 개구부는 앉아서 보면 창문이고, 서서 보면 문이 된다. 대청 마룻바닥은 그 자체가 침대도 되고 걸터앉으면 걸상이 된다. 때로는 밥상도 되고, 때로는 책상도 된다. 얼마나 고마운 바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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